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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아서 뭔가 해보려고 마음을 먹는데, 딱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경험, 저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역대상 13장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기려다 웃사가 갑자기 죽는 장면을 다시 읽었을 때, 그 당혹감이 제 경험과 겹쳐 보였습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 왜 이렇게 막히는 걸까, 그 질문에 이 본문이 꽤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법: 웃사는 정말 몰랐을까
기돈의 타작 마당에서 소가 뛰자 웃사가 손을 뻗어 여호와의 궤를 붙잡았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를 치셨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출처: 바이블노트, 역대상 13장). 읽을 때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것뿐인데, 죽음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궤의 성결 규례입니다. 여기서 성결 규례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정하신 법으로, 여호와의 궤는 레위인 중에서도 고핫 자손만이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하며, 그 누구도 손으로 직접 만져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말합니다(출처: 대한성서공회). 수레에 실어서 운반한 것 자체가 이미 이 규례를 어긴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은, 웃사가 정말 몰랐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은 모세 율법에 명시된 규정이었고, 여호와의 법궤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늘 특별하게 다루어져 온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증거물을 담은 상자로, 지성소에만 두었던 가장 거룩한 기물을 가리킵니다. 그런 물건을 아무나 손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웃사의 행동이 순간적인 반응이었다 해도, 그 반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그 거룩함에 대한 인식이 충분히 내면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몸에 배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 무심함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 여호와의 궤 운반 규례: 레위인 고핫 자손이 어깨로 메어야 하며, 손으로 만지는 것은 금지
- 다윗의 행렬은 수레를 사용했고, 이것 자체가 이미 규례를 벗어난 방식이었음
- 웃사의 죽음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둔감함이 누적된 결과로 볼 수 있음
- 하나님의 심판은 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면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사건의 핵심
신앙의 걸림돌과 오벧에돔의 복: 멈추는 게 답이 아니다
웃사 사건 이후 다윗의 반응이 제 눈에 특히 들어왔습니다. 그는 화가 났고, 그 장소를 베레스 웃사, 즉 '웃사를 찢으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들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감격과 열정은 이 한 사건으로 완전히 식어버린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낯설지 않은 흐름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딱 그 시점에 방해가 생깁니다. 기도 시간을 확보하려고 일찍 일어나면 유독 그날 피곤하고, 누군가를 돕겠다고 마음먹으면 갑자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치고 들어옵니다. 아무것도 안 하려 할 때는 그런 유혹이 별로 없는데, 움직이려는 순간 걸림돌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환경이 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패턴을 보면서, 그 걸림돌 자체가 신앙의 시험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포기한 그 여호와의 궤는 이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 그의 집에 머물렀는데,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오벧에돔은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떠맡은 자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궤가 머무는 곳에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직접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의 임재(臨在)는 내가 충분히 준비됐을 때만 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임재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심을 뜻하는 신학적 개념으로, 이 본문에서는 궤가 머무는 곳이 곧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리임을 보여줍니다.
다윗 입장에서 보면, 두려움 때문에 멈춘 그 결정이 결국 무엇을 놓치게 했는지가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오벧에돔이 받은 복은 원래 다윗의 성에서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분명합니다. 졸리다고, 귀찮다고, 무섭다고 멈추는 순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다른 곳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의 후회는 이후 역대하 15장에서 그가 다시 여호와의 궤를 옮기러 나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때는 규례대로, 레위인이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웃사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건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신 건가요?
A. 저도 처음엔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그 순간의 행동보다, 그 행동이 나올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이미 잘못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는 방식부터 규례를 어긴 것이었고, 그 잘못된 방식에 평소에 아무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근거로 보입니다. 반사 반응은 평소에 내면화된 것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Q. 신앙생활 중에 막히는 일이 생기면 그게 다 하나님의 뜻인가요?
A. 저는 모든 막힘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두려움에서 비롯된 회피가 막힘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한 대부분의 걸림돌은 환경이 아니라 제 내면의 피곤함, 귀찮음, 작은 유혹이었습니다. 막힘이 생겼을 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보다 "처음 다짐이 무엇이었는가"입니다.
Q. 오벧에돔은 특별히 뭔가를 준비했기 때문에 복을 받은 건가요?
A. 본문에는 오벧에돔의 준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갑자기 떠맡은 자리였습니다. 이 부분이 제게는 오히려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에 복이 따른다는 것은, 내가 완벽하게 준비됐을 때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논리를 뒤집습니다. 일단 그 자리에 있는 것,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Q. 역대상 13장 웃사 사건을 오늘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나요?
A. 제가 이 본문을 적용하는 방식은, 처음 다짐과 결심이 흔들릴 때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걸림돌이 생겼을 때 포기보다 먼저 할 일은, 그 방식이 처음부터 옳았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중에 규례대로 다시 시작한 것처럼, 방식을 바로잡고 다시 움직이는 것이 두려움으로 멈추는 것보다 낫습니다.
결론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계속 질문했던 것은, 왜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막히는가였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13장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막힌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막혔을 때 두려워서 포기하는 것이 문제라고. 다윗은 웃사 사건 하나로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넘기고 물러섰습니다. 그 석 달 동안 오벧에돔이 받은 복은, 다윗의 성에서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 패턴은 지금도 반복됩니다. 말씀 묵상을 시작하려는데 졸리고, 기도 자리를 지키려는데 일이 생기고, 누군가를 돕겠다고 나서면 갑자기 계산이 앞섭니다. 그 모든 걸림돌 앞에서 제가 배운 것은, 일단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새기고, 방식이 틀렸다면 바로잡고, 그래도 움직이는 것. 오벧에돔처럼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 https://www.biblenote.kr/read.html?translation=H1_GAE&book=OLD13&chapter=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