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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야베스의 기도를 처음 접했을 때 그냥 넘겼습니다.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말이 너무 세속적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래 들여다볼수록 이 짧은 기도 안에 담긴 맥락이 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사람이 그 이름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사실, 그 하나의 장면이 제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편견을 조용히 무너뜨렸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이유
제가 오랫동안 야베스의 기도에 가졌던 편견은 꽤 뿌리 깊은 것이었습니다. 소위 기복신앙(祈福信仰)이라는 틀로 이 기도를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복신앙이란 신앙의 핵심을 현세적 복, 즉 건강·재물·성공 같은 물질적 이익을 얻는 데 두는 종교 행태를 가리킵니다. 저는 야베스의 기도가 딱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역대상 4장은 사실 계보(系譜), 즉 이스라엘 족보를 기록한 단락입니다. 베레스, 헤스론, 훌, 소발 같은 이름들이 줄줄이 나열되는 그 건조한 목록 한가운데에 야베스라는 인물의 기도가 불쑥 끼어 있습니다. 계보란 혈통의 연속성을 문서화한 기록으로, 그 안에 개인의 이야기가 삽입되는 것 자체가 이미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구조적 특이함보다 기도의 내용에만 집중했습니다.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나를 도와 환난을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문장만 뽑아 읽으면 자기 중심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도를 한동안 진지하게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기도의 맥락이 아니라 기도의 문장만 뽑아서 판단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에 매이지 않은 사람
야베스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고통' 혹은 '슬픔'을 뜻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과 운명을 규정하는 언어적 선언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니 야베스는 평생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고통'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산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두고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기록합니다. 귀중하다는 표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 카베드(כָּבֵד)는 '무게가 있다', '존중받는다'는 뜻을 가집니다. 쉽게 말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실제로 무게감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이 '고통'인 사람이 '존귀한 자'로 불리게 된 역전,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그의 간구(懇求)입니다. 간구란 간절히 청하는 기도로, 단순한 소원과 달리 신뢰를 전제한 부르짖음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멈칫했습니다. 제가 지난 수십 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미 너무 늦었다", "공부를 너무 안 했다", "도움을 구할 유력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야베스가 가진 이름이 저에게는 나이, 환경, 경제적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모양의 족쇄였을 뿐입니다.
- 야베스의 이름 '고통' → 정체성을 규정하는 언어적 선언으로 기능
- '귀중한 자(카베드)' → 히브리어 원어상 무게감 있는, 존중받는 사람
- 이름과 삶의 역전 사이에 있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간구
제가 야베스처럼 살지 못했던 시간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면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말이 맞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실제로 가장 힘들었던 시간, 빚이 쌓이고 아내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게 되었을 때, 저는 야베스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손을 붙들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목적 없이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제가 하던 일에서는 제때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일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 택배 일을 시작해서 정상적인 급여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쌓인 재정적 어려움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 시절의 일상이었습니다.
그 고통과 답답함 안에서 저는 야베스처럼 지경을 넓혀 달라고 부르짖기보다는, 그저 고통 그 자체에 눌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던 기억만 지금도 선명합니다. 야베스가 보여준 신뢰 기반의 간구, 즉 하나님이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전제로 한 부르짖음을 저는 그때 제대로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이 지금도 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역대상의 계보 기록이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포로 귀환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신학적 문서로 기능한다고 봅니다(출처: Bible Gateway Encyclopedia of the Bible). 그 맥락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든 사람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지금 제가 드리고 싶은 기도
야베스의 기도를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저는 이 기도가 결코 자기 중심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축복(祝福)을 구하되, 그 축복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축복이란 단순히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통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자력(自力)이 아닌 신력(神力), 즉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기대는 구조입니다.
저는 이제 나이에 매여 스스로 한계를 긋는 삶을 살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스스로를 '이미 늦은 사람'으로 규정하는 순간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간구하려는 의지입니다. 포기한 사람은 기도도 얕아집니다. 야베스는 고통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地境)을 넓혀 달라고 구체적으로 청했습니다. 지경이란 땅의 경계, 즉 삶의 영역을 뜻하는 표현으로, 단순히 부동산을 넓혀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과 영향력을 확장해 달라는 간청으로 해석됩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의 어려움과 아픔이 아내와 자녀들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넉넉함으로 다른 어려운 이를 돕고 섬길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 연구에서 야베스 단락은 특별한 내러티브 삽입(narrative insertion)으로 분류되는데, 이는 계보 안에서 의도적으로 강조된 신학적 메시지임을 의미합니다(출처: TheTorah.com).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허락하셨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수천 년을 넘어 제게까지 닿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야베스의 기도가 기복신앙 아닌가요?
A.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현세적 이익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주도권을 전제로 한 간구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기복신앙과 구분됩니다.
Q. 야베스는 성경에서 왜 갑자기 나오는 건가요?
A. 역대상 4장은 유다 지파의 계보를 기록한 단락입니다. 그 긴 족보 목록 한가운데 야베스의 기도가 삽입된 것은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학자들은 봅니다. 족보 안에서 이름과 기도가 함께 기록된 인물은 매우 드물어, 그것 자체가 이미 이 기도에 특별한 무게를 부여합니다.
Q. 야베스처럼 기도하면 정말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A. 성경은 하나님이 야베스의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의 핵심은 응답의 공식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이름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부르짖었다는 자세에 있습니다. 기도의 형식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먼저라는 것이 제가 이 구절에서 얻은 결론입니다.
Q.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A. 히브리어에서 지경(地境)은 땅의 경계를 뜻하지만, 문맥상 삶의 가능성과 영향력의 영역을 확장해 달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단순한 물질적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넓은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론
야베스의 기도를 편견 없이 다시 읽고 나서, 저는 제 안에 있던 두 가지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이 기도를 기복신앙으로 규정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 자신을 '이미 늦은 사람'으로 규정하며 간구조차 포기했던 것입니다. 야베스는 위대한 조상도 아니었고, 특별한 배경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보 기록 한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지금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 이름과 상황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부르짖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그 기도를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참고: http://www.holybible.or.kr/B_GAE/cgi/bibleftxt.php?VR=9&CI=3332&CV=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