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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 105-120절 묵상
시편 119편 105-120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말씀은 단지 예배를 드릴 때나 영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때, 고난 가운데 흔들릴 때에도 나의 걸음을 비추는 기준이 된다.
특히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남는 것은 한 가지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등불은 모든 길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걸어가야 할 다음 걸음을 밝혀준다.
어두운 길을 걸을 때 손전등 하나만 있어도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길 전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지금 한 걸음을 안전하게 내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삶에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릴 때 안전한지, 위험한지 따져본다. 가까운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도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고, 여러 가지 걱정과 계산을 섞어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요한 결정과 연결하지 않을 때가 많다.
성경은 영적인 문제를 다룰 때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발을 비추고 자신의 길을 밝혀준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할 것인가?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방향을 보여주는 기준이 될 수 있다.
106절,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결단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의로운 법도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그것을 굳게 다짐한다.
여기서 나는 믿음이 단순히 말씀을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말씀을 읽는 것과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정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 생각과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결정하는 기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결단도 쉽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믿음에는 결단이 필요하다.
“주님의 말씀이 옳기 때문에 나는 그 말씀을 따라가겠습니다.”
이 고백이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107절, 고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들다
시편 기자는 심한 고난 가운데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살려 달라고 간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고난이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도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아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평소에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
내가 가진 돈과 경험인가?
사람의 도움인가?
나의 판단과 능력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108-110절, 위기 속에서도 말씀을 잊지 않는 사람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예배를 받아 달라고 요청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부끄럽게 다가온다.
나는 큰 위기가 찾아오면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평범한 일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잊어버린다.
죽음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한데, 아무런 위기가 없는 날에는 그 말씀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왜 그럴까?
어쩌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생명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씀이 정말 내 삶을 살리는 것이라면 위기의 순간뿐 아니라 평범한 하루에도 붙들어야 한다.
111절,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남겨주고 싶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증거들을 자신의 영원한 기업이라고 고백하며 그것을 마음의 기쁨으로 삼는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표현을 묵상하게 된다.
기업은 단순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정말 소중한 유산은 무엇일까?
돈이나 재산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좋은 교육과 경험도 물려줄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귀한 유산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다.
“주님, 우리 가정에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유산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가족 모두에게 주님의 말씀이 가장 귀한 보물이 되게 해주십시오.”
사람의 좋은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귀하고, 세상의 수많은 조언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진리임을 믿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한다.
112절, 끝까지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려고 자신의 마음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지속성이 있다.
잠깐 말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말씀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이 뜨거워질 때도 있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는 삶은 감정에만 의존해서는 지속될 수 없다.
마음이 흔들려도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분이 좋을 때도 말씀을 붙들고, 힘들 때도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113절,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삶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이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정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 필요와 감정에 따라 쉽게 흔들리지 않는가?
상황이 좋을 때는 하나님을 신뢰하다가 어려움이 찾아오면 나의 계산을 먼저 의지하지는 않는가?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마음이 한곳에 고정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고백이 나의 기도가 된다.
“주님, 제 마음을 주님의 말씀에 고정시켜 주십시오. 감정과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버리고 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114절, 말씀은 나의 은신처이며 방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은신처와 방패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은 계속 변한다.
나의 생각도 변한다.
상황에 따라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변하는 나의 감정과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겠다는 결단이다.
115-117절, 위기 때만 하나님을 찾는 믿음은 아닌가
시편 기자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서 떠나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붙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구원을 얻겠습니다.”
이 고백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려울 때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닌가?
위기가 찾아오면 “주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평소에는 내가 알아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위기의 순간에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시편 기자가 “항상 주의 율례들에 주의하겠다”고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118-119절, 말씀을 떠난 삶의 끝은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례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속임수가 헛되다고 고백한다.
여기에서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비교하게 된다.
나는 때때로 내 생각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험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나의 생각이 언제나 옳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을 더 신뢰하기 시작할 때 교만이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은 나의 생각을 모두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내 생각이 말씀과 다르다면 내가 옳다고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120절, 왜 육체가 떤다고 했을까
마지막 120절의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시편 기자는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하므로 떨며”라고 고백한다.
단순히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존경한다는 정도의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그의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깨닫는다면 그분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게 된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던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내 생각과 판단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던 교만도 내려놓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하기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을 너무나 중요하고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을 의지하는 삶으로
시편 119편 105-120절을 묵상하면서 결국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등불로 삼고 있는가?”
성경을 읽는 것과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다르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말씀을 의지하는 것도 다르다.
내가 결정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내 생각과 감정이 흔들릴 때 다시 말씀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는 삶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의 조언을 구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판단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말씀이 아니다.
내 가정에서 필요하고, 직장에서 필요하고, 인간관계에서 필요하며, 돈과 선택과 미래를 고민하는 순간에도 필요하다.
말씀은 내가 가야 할 길을 모두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내디뎌야 할 한 걸음을 밝혀준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한다.
“주님, 제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제 마음을 고정하게 해주십시오. 위기의 순간에만 주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에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정의 가장 귀한 유산이 되게 하시고, 제가 끝까지 그 말씀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마음을 두고, 그 말씀을 따라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먼저 주변의 소음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싶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걷는 그 길이 내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며, 어둠 속에서 내 발걸음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이다.